이사야 6장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는 시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웃시야 왕은 한때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촉망을 한몸에 받던 능력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사람들은 웃시야를 다윗의 자손으로 기대했지만,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을 침범한 그의 교만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남은 평생을 나병환자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촉망 받던 왕으로 시작하였다가 실패한 왕으로 추락해버린 웃시야가 죽자,
그가 메시야이길 바라고 기대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큰 실망과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실망과 절망이 아닌 소망을 발견케 하기 위하여,
불의한 왕 대신 의로우신 왕으로서, 죽은 왕이 아닌 진정한 생명의 왕으로서 이사야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대면한 선지자 이사야의 첫 마디가 너무나 아이러니합니다.
이사야는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뵙고선 소망의 탄성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의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5).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한 사람이 가장 먼저 신경쓴 것은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보좌의 영광을 본 결과가 자기 발견이었다는 이 역설 안에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진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예배는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입니다. 마치 거울 처럼 말입니다.
예배는 매주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3:18)라고 말합니다.
예배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영광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거울은 평생 한 번만 보고 마는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거울을 쳐다봅니다.
외출 전에도 보고, 식사 후에도 보고,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도 다시 한번 들여다 봅니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반응합니다.
흐트러진 것을 가다듬고, 묻은 것을 닦아냅니다.
거울의 기능이 원래 그렇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아 정리하고 정돈하는 것입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동안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반응해야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거울 앞에 서는 일이란 본성상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못된 습성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게 되면,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았던,
나조차도 부정해왔던 내 본모습이 드러나 내 마음을 사납게 할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긁혀버린 마음 때문에 속앓이를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죄성을 부정하고 외부적인 요소들만을 탓합니다.
원수는 언제나 우리에게 “너는 괜찮아, 너는 문제없어, 저들이 문제야” 라고 속삭입니다.
문제는 내 속이 아니라 언제나 내 밖에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계속하여 나의 죄성을 은폐시키고 위장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의 그런 습성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라 그들의 귀가 막히게 하라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사6:10)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우상의 모습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우상의 특징은 형태는 있는데 기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시 115:5).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지 않고 은폐하고 위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주인으로 삼고 사는,
즉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상 숭배자들의 결국을 우상과 동일하게 영적으로 무감각한 존재로 그려냅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우상이 된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에 무감각하고, 진리의 말씀 앞에 감격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돌아보지도, 스스로에게 절망하지도, 구원의 은혜를 간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 대상이 아니라 내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즐거움의 대상이시지 이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용의 대상이 된 하나님 앞에서는 더 이상 “화로다 나여”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면한 자에게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의 입술은 부정한 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울 앞에서 부정함이 드러난 입술에는 숯불이 임합니다.
스랍 중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의 핀 숯을 가져다가 그의 입에 대며 말합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
하나님은 번제단의 불길로 그를 정결케 하시고, 다시 말하게 하십니다.
정결케 된 입술은 새로운 언어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예배의 언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 관계의 언어입니다.
언어를 모르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웃을 수 없습니다.
공감할 수 없습니다.
언어는 지식이자 경험입니다.
매주 우리가 예배에 모이는 이유는 예배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정결해진 입술의 고백은 예배의 언어로써 회개를 말하고, 감사를 말하며, 솔직하게 고충을 아뢰고, 겸손히 도우심을 구합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야 건강한 관계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부자간에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사는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겸손함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예배를 통해 겸손한 사랑의 언어를 가르쳐 주실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