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나팔과 우레, 번개와 짙은 연기, 온 산을 태울 듯한 불길 속에 시내산에 강림하시자,
백성들은 그 장엄한 광경을 더 가까이서 보려고 나아왔습니다.
백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나님이 경고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 하던 백성들의 머리 위로
천지를 진동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백성들에게 열가지 계명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에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장엄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릴 만큼 두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갑작스레 백성들의 태도가 두려움으로 바뀐 것은
십계명의 말씀들이 그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밝히 드러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계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비추는 거울과 같았습니다.
그 거울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숨길 수 없습니다.
마음의 죄까지 드러나는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죄인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십계명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감히 죄인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임재는 공포의 불길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모두 불태우고 소멸시킬 것만 같은 두려움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뒷걸음질 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세에게 간청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들의 두려움은 이상한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이 서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두려움이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게 만듭니다.
도망하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위엄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함께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에게 놀라운 권면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권면은 마치 모순처럼 들립니다.
경외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야레’는 두려움과 같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3인칭 단수로 사용되어, 직역하면 ‘너희 얼굴 위에 있어야 할 그의 두려움’이라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왜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또다시 ‘그의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해할 수 없는 권면을 말한 모세는 ‘두려워말라’는 자신의 말처럼,
물러서는 백성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 나아갑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불 타오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죄인들의 악행을 태워버릴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 불 가운데 들어갔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신데, 어째서 흑암에 계신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흑암이라는 표현으로써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의 불꽃이 단 한 줄기도 모세에게 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맹렬한 불꽃의 열기 단 한 점도 모세에게 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타오르는 불 가운데서도 모세는 빽빽한 구름으로 덮여 안전했습니다.
그래서 흑암이었습니다.
이 흑암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이 흑암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는 구름으로 인한 것입니다.
흑암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기 위해 만든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죄인을 태우지 않도록 가려주는 보호막이었습니다.
죄인을 보호하기 위해 베푸신 은혜의 장막이었습니다.
그것이 불 가운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연기가 가득했던 이유입니다.
불기둥이 언제나 구름기둥과 함께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그들을 보호할 장막으로 가려주신 것입니다.
진노의 불길은 죄를 향해 실제로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불꽃은 더 이상 우리에게 닿지 않습니다.
우산이 우리 대신 비를 맞아 젖게 되듯,
우릴 덮고 있는 장막이 우리 대신 죽음의 불길을 맞아 죽음에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우릴 위해 그 몸을 찢어주신 장막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백성들은 죽을까 봐 두려워했지만,
정작 그 죽음을 대신 짊어지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그 밤,
죽음을 결단하며 그가 겪으신 그 두려움은 인간이 겪을 죽음의 공포와 비할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삼위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본 적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기꺼이 버림받기를 결단하셨습니다.
죽음 앞에 선 우리의 두려움은 그날 밤 그분이 삼켜 내신 두려움에 감히 비할 수 없습니다.
그가 우리의 두려움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감당하신 그 두려움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신 사랑의 두려움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우리의 얼굴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의 두려움’이 끝내 사랑이었음을 안다면,
우리는 십자가 그늘 아래, 전능자의 그늘 아래,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는 은혜의 흑암으로 나가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두려움은 우리를 물러서게 하지만, 사랑은 우리를 다가서게 할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