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장터에 모여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의 행태를 비유하셨습니다.
이천 년 전 그 옛날엔 아이들이 놀만한 것이 정말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일상에서 신나는 일을 따라 하며 놀았는데,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신나고 재미있는 것은 잔치입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결혼식입니다.
결혼식엔 노래와 춤이 빠질 수 없고 무엇보다 결혼식 잔치는 일주일이나 지속되었습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춤추는 이 시간보다 재미있는 시간이 또 있을까요?
장터에 모인 아이들은 즐거운 결혼식을 재현하며 놀았습니다.
아이들이 인상 깊게 여기는 잔치를 한 가지 더 꼽자면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은 여러모로 보아 결혼식의 정반대 예식입니다.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시간에 모여 함께 울며 줄을 지어 함께 이동하는 모습이 아이들에겐 굉장히 인상적이었을 것입니다.
결혼식은 자유롭고 즐거운 데 반해 장례식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시간 속에서 질서 가운데 진행되는 예식은 아이들에게 결혼식과 구별되는 좋은 놀이 주제였습니다.
아이들은 결혼식 놀이를 하며 신랑과 신부의 역할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고 노래를 부르며 그 장단에 맞춰 하객들처럼 춤을 췄습니다.
결혼식 놀이가 지겨워지면 정반대로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 상여를 따라가는 상주와 문상객들처럼 곡소리를 흉내 내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비유는 이 놀이가 잘 이뤄지는 때가 아니라 아이들 간의 의견 차이로 놀이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다 보면 흔히 보게 되는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잘 놀다가도 갑자기 울면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이 내 맘대로 따라주지 않는 순간이 종종 생기기 때문입니다.
비유에서 장터의 아이들은 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상대방을 탓하며 다투고 있습니다.
피리를 부는데 왜 춤을 안 추느냐고 탓합니다.
곡하고 있는데 왜 따라 울지 않느냐고 탓합니다.
자기 장단에 맞춰주지 않는 상대를 향한 아이들의 분노처럼
일부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탓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지적하신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길래 사람들은 이렇게 상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일까요?
세례 요한은 떡과 포도주 대신에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사람들의 죄악을 폭로하고 회개시키는 사역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세례 요한은 모여든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런 세례 요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선행과 평판과 인정이 아무것도 아닌 듯 무시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귀신에 들렸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후 이번엔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또다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자신들을 상대로 ‘고생했다, 수고했다’ 칭찬하시고 인정해 주시기는커녕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나 의원은 쓸 데 있다’고 하시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면서
언제나 별 볼 일 없는 죄인들의 편에 서 있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먹깨비에 술고래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비유하신 것은 예수님의 정확한 비유였습니다.
아이들은 결혼식과 장례식의 차이를 구별하여 놀이하면서도 정작 결혼식과 장례식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에겐 결혼식장도 뛰어노는 놀이터이고 장례식장도 놀이터입니다.
사람들이 왜 즐거워하는 것인지, 왜 그토록 가슴 아파하며 우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결혼식장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정을 부리며 울고,
장례식장에서도 곡소리를 따라 하며 키득거립니다.
아이들은 그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으면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방하며 화를 내고 슬퍼합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컨트롤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까지라도 감정을 표출하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어린애같이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주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은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은 놀이터가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웁니다.
장터가 아니라 결혼식장에서 즐거워합니다.
지혜는 울어야 하는 곳에서 울고 웃어야 하는 곳에서 웃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로 인하여 사망의 권세에 대신 던져지신 장례식임과 동시에
의에 대하여 파산해 버린 우릴 큰 죄에서 건져내려 우리를 신부 삼으신 결혼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울고 웃어야 할 진정한 장소는 십자가입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십자가’를 따르게 합니다.
지혜의 자녀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공감은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주님은 우리를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