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주일 함께 나눌 본문은 룻기 강해 4번째 시간으로 룻기 2장 7~16절까지 말씀입니다. 
아래는 주일을 준비하며 금요기도모임 시간에 각 가정에서 말씀을 미리 살펴보고 연구한 질문들 입니다. 
마중물과 같은 이 과정을 통해 말씀이 더 깊이 깨달아지고 경험되어져서 그 말씀으로 영양분 삼아 살아갈 힘이 공급될 줄로 믿습니다. 
그 시간에 함께 하지 못한 성도들이라도 그 유익을 함께 누리기 위해 질문을 공유합니다. 
사랑합니다. 

# 룻기 2장 7~16절

2:08 – 보아스는 룻에게 왜 여성들을 따라다니라고 꼭 집어 말했을까?
2:08 – 보아스는 왜 룻에게 “내 딸”이라고 했을까?
2:09 – 목이 마르면 소년들이 길어온 것을 마시라는 표현이 굳이 기록되었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보아스의 친절함에 대해 부각시켜주고자 하는 목적이었을까?
2:09 – 9절에서 건드리지 말라, 15절에서 책망하지 말라, 16절에서 꾸짖지 말라와 같은 표현들이 반복되고 있는데, 
           룻이 이런 대우를 당하고 있었나? 혹은 당할 확률이 높았던 것인가? 당시 이방여인들은 저런 대우를 당할 위험이 많았나?
2:09 – 8절의 소녀와 9절의 소년은 누구인가?
2:10 – 은혜, 돌보는 것은 13절의 은혜, 위로와 병행되는가?
2:10 –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는 종이 주인에게 표하는 행동 아닌가? 경배와 존경의 표시인가?
2:11 – 5절을 보면 보아스는 룻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다”고
           말할 정도로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
2:12 – 룻이 행한 일 때문에 하나님이 보답하시기를 바라는데, “완전한 상”을 주시기를 바라는 이유가 룻이 어려운 선택(11절)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왔기 때문인가?
2:12 – 룻이 행한 일에 여호와께서 보답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11절에 고국을 떠나 여호와께로 온 일 때문인가?
           또한 온전한 상을 주시기를 원한다 하셨는데, 그 온전한 상은 구원을 뜻하는 것인가?
2:13 – 10절의 은혜와 13절의 은혜는 같은 것인가?
2:13 – 보아스의 하녀 중 하나와도 같지 않던 룻을 보아스의 식사자리에 가까이 오게 하여 떡을 먹게 해주는 것은,
           신약에서 주로 반복되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식사 자리의 초대의 유비인가?
           그렇다면, 12절에서의 보답과 온전한 상이란 결국 이와 같은 것임을 의미하는가?
2:13 –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에서 “당신”이 히브리어 “아인”이던데, 눈이란 말이 당신으로도 번역되는가?
2:13 – 보아스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룻에게 보답하고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룻은 왜 “여호와”가 아니라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한다고 대답했을까?
2:14 – 대화 이후에 갑자기 식사 장면으로 넘어가는 이유가 있을까?
2:14 – 떡을 먹으라고 하였으니 떡을 주어야 할 것 같은데 볶은 곡식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2:14 –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표현은 의도가 있는 표현일까?
2:14 – “식사”는 점심 식사 시간인가? 보아스가 “이리로 와서”먹으라고 했을때,
           룻이 “곡식베는 자” 곁에 앉았다고 한 걸로 보아, 곡식 베는 자들은 원래 땅 주인과 식사를 같이 하는가?
2:14 – 그냥 떡을 먹으라고 해도 될텐데, 초에 찍어 먹으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초가 귀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보아스의 친절함을 부각시키고자 함인가?
2:14 –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는 구절은 마치 오병이어의 광경을 연상시키는데, 연관이 있을까?
2:15 – 보아스가 룻에게 곡식단 사이에서 줍도록 허락하며 소년들에게 명령하는 장면을 보면,
           이미 룻은 보아스를 만나기 전에 이삭을 줍고 있었던 것이 아닌 것인가? 이미 줍고 있었다면 새삼스레 다시 허락한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 율법의 요구 이상으로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와 그 은혜를 일방적으로 받게되는 룻의 모습이
       예수님과 신부되는 우리들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데 그렇다면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오도록 만드신 주체는 룻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인가?
# – 여인의 이름으로 기록된 에스더와 룻기에서 하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