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기도모임 때 나누었던 주일 설교 본문의 관찰 질문들 입니다.
현장에 참여하지 못한 성도들은 문자로 질문을 남겨주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리한 질문들을 공개합니다.
이에 대한 내용들은 주일 설교 시간에 다루게 될것입니다.
물론 11시 예배 설교 때에 모든 질문을 다 다룰수는 없습니다.
더 깊은 질문들을 나누실 분들은 2시 예배에 참석해 주세요.
참고로 내일부터는 2시 예배 실황 송출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질문과 답변의 연결이 유튜브 상에서 확인이 어렵고,
질문하시는 성도님들도 마음껏 질문하지 못하고 부담을 느끼고, 답변하는 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내일 함께 나눌 성경 말씀에 대한 질문들 입니다.
질문을 들으며 요약으로 필기 했던 것이라, 질문이 매끄럽지는 않겠지만,
도움이 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개합니다.
이중에 질문을 좀 다듬고, 중복된 질문은 합쳐서 주보에 게재하려고 합니다.
사랑합니다.^^
본문 질문
42절 – 사도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42절 – 사도의 가르침이란, 지금 우리가 예배때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내용인가?
42절 –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후에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하고 마무리된 후, 요한의 기사가 나와도 될텐데, 굳이 본문이 이 위치에 끼어들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42절 – 사도의 가르침, 교제하고 떡을 떼는것, 기도하는 것. – 이것은 교회의 표징과 관련이 있나요?
43절 – 두려워한다는 것이 3000명을 말하는 것일까?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처럼, 나의 죄가 들어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일까?
43절 – 두려워 하는데? 43절 없이도 잘 이어지는데 왜 굳이 43절을 넣었을까?
43절 – 무엇을 두려워했나요? 사도들이 행하는 기적들을?
43절 – 두려워하는 이유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문인가? 아니면 사도의 표적과 기사 때문인가?
43절 – 사람들이 기사와 표적을 두려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43절 – 베드로의 설교내용이 율법의 행위를 버리고, 예수께 나오기인데, 자기 삶의 전환에 대한 두려움 아닐까?
43절 – 믿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있는 것이라면, 거룩한 절망으로 인한 두려움이라면, 삶의 전환을 앞둔 두려움이라면, 이 건 성령이 주시는 두려움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단이 두려움을 이용하려는 것과 구별하여 성령이 주시는 두려움을 어떻게 분별 할수 있는가?
43절 – 기사와 표적이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물건을 통용하고 나누는 것 처럼 기술되어 있는데, 이유가 무엇일까?
44절 – 오순절 이후에 본문이 등장하는 이유? 방언 사건은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있나?
44절 – 다함께 있어? 어디에 함께 있었나요? 46절에서 말하는 성전과 집 외에 다른곳?
44절 – 통용이라는 말, 코이노스는 부정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던데, 그저 좋은 말로 이해하면 되는 건가요?
44절 – 성도 공동체 안에 국한된 나눔일까?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적용할때, 대외구제보다 대네구제가 우선인 것일까?
대내구제라면 칭송받을 이유가 될 수 있었을까?”
44절 – 애초에… 근본적으로… 왜 물건을 통용해야 하는 것일까? 예수믿는 사람들은 물건을 통용해야 할까?
45절 – 재산과 소유를 팔때에 어떤 규칙 같은것이 있었나요? 비율이나 방식 등?
46절 – 매일? 매일 예배드린건가요?
46절 – 가정집에서 성찬이 행해졌다는 말인가? 아니면 가정집에서 식사를 했다는 말인가?
46절 – 성찬은 사도들이 집례 했을까? 이반 성도들이 했을까?
47절 – 칭송 받을만한 이유가 딱히 보이지 않는데, 그저 재산과 소유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가요?
47절 – “재산과 소유를 나눈것은, 그저 공동체 안에 국한하여 일어난 일인거 같은데, 왜 백성에게 칭송을 받은 것인가요? 자기들에게 은혜 베푼것도 아니라면…
심지어, 46절에는 두려워했다고도 하는데, 두려움과 칭송이 함께 표현되는게 희안하다.”
47절 – 예수님 사건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을텐데, 순식간에 칭송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상대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일까?
47절 – 구원받을자를 더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원래 정해진 숫자보다 정원이 늘어나도록 은혜 베푸셨다는 말일까?
47절 – 백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44절에 문장 주어는 ‘믿는 사람’ 이었다. 믿는 사람과 백성을 대비시킨다는 것은, 왕과 백성의 대비 같은 것일까? 즉 천년동안 왕노릇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