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주일에 함께 나눌 본문은 누가복음 15장 11~32절 말씀입니다. 
제가 서울광염교회에서 사역할때 강도사가 되어 처음 했던 설교 내용이니
본문을 처음 연구했던 것이 벌써 10년전입니다.
이후로도 성경연구 강의에서 단골로 연구하던 본문입니다. 
뉴시티광염교회 성도들 중에는 이 본문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분들도 있지만, 
성경은 다시 보고 다시 보아도 더욱 흥미로워지며 은혜가 깊어지는 법이지요. 

아래는 이번 9월 4일 금요일 기도모임 시간에 각 가정에서 성도들이 연구하여 보내준 질문들 입니다. 
네이버 밴드를 통해서 진행된 기도모임에서 댓글로 달린 질문들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이 중에 몇가지 질문을 주보에 게시할 예정입니다. 
사랑합니다. 

11절 – 오늘 본문의 앞선 문맥에 있는 두가지 비유와 본문의 비유가 다 비슷한 느낌인데, 이토록 비슷한 비유들을 연달아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까?
11절 – 이 세가지 비유에서 각각 잃어버린 것의 가치가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양 < 드라크마 < 아들로 가치가 커지는 것이 맞을까?
12절 – 12절. 분깃을 요구하며 그것을 어떻게 쓸것인지 아버지는 살면서 아들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재산을 왜 나누어주고, 또 왜 보내주었을까?
12절 – 미리 재산을 요구한 둘째 아들은 율법을(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어겼기에 죽여야 함에도 죽이지 않은 아버지 또한 율법을 어긴것 아닌가? 그에 따른 책임은 본문이나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나?
17절 – 앞선 문맥의 비유인 양과 드라크마는 ‘스스로 돌아올 수 없어’ 주인이 찾아야 했던 것이였는데, 이에 비해 본문의 비유인 탕자는 17절에서 ‘스스로 돌이켜’ 라고 한다. 같은 흐름의 비유라면 탕자 비유 또한 ‘스스로 돌이킴’ 이 아니라, ‘돌이킴’의 주도권이 아버지에게 있어야 하지 않나?
18절 –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가서, 그냥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20절 – 아들이 미리 돌아간다고 알리지도 않았을텐데… 거리가 먼데도 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간 아버지는 어떻게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지 알았을까?
20절 – 만약 아들이 후회나 반성없이 ‘아버지가 낳은 아들이니 책임지라’는 태도로 돌아왔다면 아버지는 그래도 잔치를 열었을까?
21절 – 분깃을 받고 떠난 아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돌아온 아들은 남은 재산은 형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버지께 죄룰 지었다는 말만 있고 형에 대한 미안함의 언급은 왜 없을까?
23절 – 12절에서 재산을 각각 나누어주었다면, 나머지는 첫째아들의 소유인데, 왜 아버지는 첫째아들에겐 염소한마리도 안주더니, 첫째 아들 몫으로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배풀까?
24절 –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죽었다가 다시살았다고 표현한 이유가 있을까? 지난시간 배웠던 거듭남, 물과성령의 세례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될까?
25절 – 잔치를 시작할 때 첫째 아들을 왜 안불렀을까? 밭에 있다가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안 것일까?
29절 – 큰아들의 말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 교인들의 억울함과도 같은 것일까? 열심히 신앙생활 할 필요 없이 작은 아들처럼 자유롭고 방탕하게 살다가 한번 회개해도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라면 억울할만 하지 않을까?
29절 – “섬겨=>둘류오” 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는 사전에서 예속되다 종이 되다 등의 뜻이었다. 왜 첫째 아들이 스스로 아버지를 섬겼다고 표현했을까?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었는데.
32절 – 첫째 아들의 ‘회개’의 결론 없이 마무리 되는데, 본문의 내용으로 첫째 아들이 돌이켜 잔치에 참여했을지 알 수 있을까?
16:14 본문 이후에 16장에서도 비유가 계속되어, 총 네 가지 비유가 연이어 나오고 있는데, 16:14에서 그 후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는다고 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에 오늘의 본문이 포함된다면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것과 이 비유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